2008년 01월 14일
[도서] 파르마의 수도원 (La Chartreuse de Parme) 1·2

세계문학전집 48 - 파르마의 수도원 1
세계문학전집 49 - 파르마의 수도원 2
저자: 스탕달 (Stendhal)
역자: 원윤수, 임미경
출판사: 민음사
발행일: 2001년 8월
ISBN: 89-374-6048-3/89-374-6049-1
어렸을 때부터 백과사전이나 위인전은 그럭저럭 읽었어도 세계 고전이라면 질색했다. '제인 에어'를 읽는 초등학생을 보면서 '내가 이 나이를 먹도록 고전에 손을 안 대도 되는 걸까' 하고 찔리기도 했다. 그런데 오랫동안 이어진 명작 기피증을 해결하는 건 의외로 간단했다. 영화나 다른 책에서 살짝 언급되는 작품 중 스토리가 끌리는 것을 골라서 편하게 읽으면 되는 것이었다. 시각 매체로 바뀐 것을 먼저 보는 것도 한 방법이지만, 그렇게 하면 책으로 읽을 때 주인공들이 영화배우 얼굴로 보인다거나 하는 현상이 일어나서 마음껏 망상할 수가 없다 ㅠ_ㅠ;
일전에 같은 작가의 '적과 흑'을 읽을 때도 그랬지만, 소위 명작으로 꼽히는 책이라고 해서 긴장하거나 부담가질 필요는 없는 것 같다. 음모와 불륜과 성직매매와 정치적 대립 등 별의별 부도덕적인 사건이 등장하는 와중에도 한결같이 행복을 추구하는 순수한(?) 주인공 파브리스는 어떤 면에서는 참 웃기고 바보같으면서도 매력적인 캐릭터다. '적과 흑'의 줄리앙이 그 나이에 갖춘 위선과는 너무도 대조적인데 이는 작품의 배경이 이탈리아라는 점에 크게 기인한다. 밀라노 공국의 후작가 차남인 그는 어린 나이에 열정에 들떠서 나폴레옹의 전투에 참전하려고 프랑스로 건너가서는 뻘짓을 거듭한다. 어머니인 후작부인이 그에게 한 말은 파브리스의 성격을 대변해 준다.
"여성에 대해 이야기할 땐 존중심을 좀 가지렴. 너의 행운을 이루어주는 것은 여자일 테니까. 넌 남자들에게는 거슬리는 데가 있고, 세속에 물든 사람들이 보기에는 너무 열정적이거든."
워털루 전투에 얼떨결에 참전했으면서도 자기가 참전했는지 아닌지도 감을 못 잡고, 대귀족의 자제로서 세상 물정을 모르기에 삽질을 반복하는 파브리스는 딱하기
하지만 스탕달은 과연 누님팬(?)을 위한 주인공을 만들 줄 안다. 열정과 감수성을 갖추고 모성본능을 자극하는 잘생긴 어린 청년이라니 이거 만고불변의 법칙이 아닐까. '적과 흑'에서 레날 부인이 그랬듯이 이 작품에서도 주인공의 그런 매력에 빠져드는 누님[...]이 있다. 바로 파브리스의 아름답고 매력적이며 재기발랄한 고모(라고 해도 나이차는 겨우 13~4세), 산세베리나 공작부인이다. 주위 귀족들에게서는 찬탄을, 아랫사람들에게서는 더없이 존경을 받는 이 고모는 연인인 모스카 백작을 따라 파르마 궁정에 들어가면서 권세를 누리게 되고, 그것이 파브리스의 일생에 큰 영향을 미친다.
자신은 고귀한 신분으로 태어났으니 그만큼 행복해야 한다는 파브리스의 생각과, 그를 신분에 맞는 지위로 만들어주고자 했던 고모의 열망이 더해져 파브리스는 나폴리에서 신학 공부를 살짝 한 것뿐인데도 파르마 대주교의 직속 보좌주교 지위를 얻는다. 진정한 사랑을 해 본 적이 없는 그는 자신에게 주어지는 고모의 애정에 부담을 느끼다가 마리에타라는 여배우와 사귀게 되는데, 그녀의 기둥서방 격인 광대 질레티의 습격을 받고 싸우다가 실수로 그를 죽이고 만다.
파브리스의 재미있는 점은 정당방위로 저지른 과실치사에 대해서는 성당에 가서 진지하게 회개하는 반면, 자신의 지위를 돈 주고 얻은 일에 대해서는 그것을 성직 매매 (simony) 라고 생각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누군가가 그에게 돈을 주면서 '아무개에게 이러이러한 직위를 주십시오' 라고 부탁했다면 그 자리에서 거절했을 텐데, 자신이 고위 성직에 오른 것은 자신에게 맞는 행복을 위한 길일뿐이라고 생각하는 사고가 참…, 어떤 면에서는 대단하다.
파브리스가 질레티를 죽인 사건은, 두 사람의 신분 차이와 살인에 다다른 경위 때문에 별 말 없이 끝날 수도 있었다. 그러나 궁정에서 모스카 백작과 대립하는 당파가 이 사건을 정치적인 이슈로 끌어들여, 파브리스는 체포되고 높은 성채 감옥에 갇힌다. 명목상으로는 징역형이지만 대공의 변덕에 따라 언제 교수형에 처해지거나 독살당할지도 모르는 위태한 환경이었다. 공작부인은 사랑하는 조카가 언제 죽을지도 모른다는 불안감 때문에 갖가지 방법을 써서 그를 빼내려 하는데, 정작 파브리스는 이 감옥에서 일전에 만났던 클렐리아 콘티와 재회하여 운명적인 사랑에 빠진다. 그는 열악한 환경과 생명의 위협이 있지만 사랑하는 사람이 있는 성채 감옥을 떠나려 하지 않는다. 클렐리아는 성채 사령관이자 자신을 부자에게 시집보내려는 아버지에 대한 의무감과 파브리스에 대한 사랑 사이에서 고뇌하다가 결국 파브리스를 탈옥시키려는 공작부인과 모스카 백작의 작전에 협력한다. 이 때를 전후에서 공작부인이 취한 대책들은 그야말로 대담하고 부도덕적이며 뜨악한 것들인데 언급하면 재미가 떨어지니까 패스.
파브리스는 탈옥 후에도 사랑하는 그녀를 그리워하다가 파르마 성채 감옥으로 도로 들어가는 뒷골 땡기는 짓을 저지른다. 공작부인과 클렐리아의 노력으로 다시금 독살의 위기를 벗어나지만, 무죄 판결을 받고 다시금 보좌주교의 자리를 얻은 그는 자신의 부와 권위가 덧없다는 것을 깨닫고 세상에 무관심해진다. 클렐리아를 매일 볼 수 있었던 성채 감옥에서의 생활을 그리워하지만 그녀는 아버지를 위해 부자인 크레센치 후작과 결혼한다. 애를 태우던 파브리스는 결국 비밀리에 그녀와의 사랑을 이루지만…, 문제는 결말이 너무나도 허무하다는 점이다. 마지막 아홉 페이지를 그렇게 마무리지을 줄은 몰랐다. 이건 '외딴섬 악마' 이후 제일 허탈하달까.
어디로 가는지 감이 안 오는 스토리 라인, 부도덕 속에서도 자신이 추구하는 행복을 찾아가는 이탈리아적으로 순수한 주인공, 극단적으로 대조적인 성격을 가진 산세베리나 공작부인과 클렐리아 콘티까지, '적과 흑' 처럼 휩쓸린다는 인상이 강한 소설이었다. 저자가 작품의 끝에 남긴 헌사인 '소수의 행복한 사람들에게 바친다 (To the Happy Few)' 는 세속적인 요소가 아니라 정신적으로 자유를 누리는 순수한 사람들을 나타낸다고 하는데, 등장 인물들이 매력적이다고 생각하면서도 그들의 열정에 거리를 두게 되는 난 역시 세상의 허영에 얽매인 걸까?
# by | 2008/01/14 23:46 | 취미생활 | 트랙백 | 덧글(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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